근황
포닥 생활을 하러 미국에 도착한지 벌써 6개월이 지났다. 이 포스트는 6개월 동안 내 머릿속에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한 글이다.
최근 연구 관련 회의를 하다 보면, 내가 꽤나 까탈스럽다는 걸 깨닫곤 한다. 좋게 표현했을 때 까탈스러운 거지, 게으른 천성 혹은 부정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특히 conceptualization 단계를 거쳐 정리된 문제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흥미도가 급감한다. 새 주제에 뛰어들 때는 배경 지식이 없으니 모든게 새롭고 재밌다고 느끼지만, 선행 연구결과들을 읽으며 지식이 쌓이면서 앞 단계에서 정리된 문제에 헛점을 하나 둘 발견하면서, 결국에는 문제에 뛰어들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고 어디 다른데 모셔둔다. 이런 경향은 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내재적 동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이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끌고 나갔을 때 결과의 기댓값이 높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는 동기이다.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경우가 매우 많고, 그 과정에서 기대보다 덜 혹은 더 흥미로운 결과들이 나오곤 한다1. 따라서 포텐셜이 높지 않아보이는 프로젝트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끌고 가다 보면 결국에는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흥미가 떨어지면 계속 해야한다는 동기 역시 급격히 떨어지고, 이내 놓아버린다는 점이다.
머릿속으로는 이런 경향이 내 생산성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지식이 늘 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포닥을 하고 있는 지금, 까탈스러움의 정점을 찍고 있다. 운이 좋게도 APECx라는 거대한 프로그램 안의 팀들 중 하나에서 연구를 수행할 기회를 얻어, 박사과정 때 연구하던 분야 밖으로 나와 새로운 주제를 공부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목표가 굉장히 명확하고 실생활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에 기여하고 싶다는 동기부여는 충분하지만, 목표 달성 여부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만 가지고는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이 걸리고 있는 상태이다. 계속 파다 보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긴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지만, 머리가 내리는 명령을 몸이 잘 수행할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응용 수학에 발을 걸치면서, 실제 응용에 사용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거나 분석하는 것의 중요성을 많이 듣고 배웠다2. 따라서 실제 응용에 사용되기 힘들어 보이는 알고리즘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어졌었다. 특히 이 페이퍼3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이 경향이 굉장히 심했었다. 출판된 결과는 사실 현업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계산 속도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어서, 과제 책임자이신 교수님, 같이 실제 연구를 진행했던 박사님께 지금 하고 있는 방향은 별로 의미 없으니 다른 방향으로 넘어가야한다고 약 두달 정도 계속 칭얼댔던 것 같다. 하지만 두분 모두 내 설득이 통하지 않았고, 결국 끝까지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연구 결과를 모아서 페이퍼를 작성하고 제출할 때 까지만 하더라도 의미 있는 연구였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었는데, 결과를 바탕으로 발표를 준비하고, 그리고 게재 확정이 난 후에는 간사하게도 뿌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적어도 "이런 알고리즘을 저런 문제에 적용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그걸 요런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정도의 스토리라인이 생기는 걸 보고서, 반드시 현업에 즉시 전력감으로 사용될 알고리즘만 연구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흥미가 덜 해진 일을 끝까지 붙잡고 해낼 수 있을까? 외부의 지속적인 압력 혹은 같이 작업할 동료의 존재가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외부의 압력을 받으며 계속 하다 보면 물론 스트레스도 받겠지만 중간에 임시 결과물들을 보고 다시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같이 작업할 동료의 존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나를 제외한 사람이 있음을 의미하고, 이는 하고 있는 작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방지하는데 요긴할 수 있다. 뭐든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같이 하는게 재밌다. 또한 권상일 교수님께서 내게 해주신 조언처럼, 계단의 평지가 생각보다 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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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페이퍼를 작성할 때는 최대한 흥미로운 결과인 것 처럼 포장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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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refethen.net/2025/05/22/what-is-mathematic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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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M.-S., Oh, J., Lee, D.-C., Lee, K., Park, S., & Hong, Y. (2025) Forward and inverse simulation of pseudo-two-dimensional model of lithium-ion batteries using neural networks. Computer Methods in Applied Mechanics and Engineering, 438, 117856. ↩